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수경 방북 사건 (문단 편집) === [[대한민국]] === 방북 자체야 [[임수경]]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했지만 [[문익환]] 목사나 [[평화민주당]] [[서경원]] 국회의원 같은 명망 있는 사회운동가도, [[황석영]] 같은 저명한 문필가도, 대학생 운동권의 핵심 인사도 아닌 평범한 여대생의 입북은 남쪽에서도 큰 관심사였고 TV 대담토론에서도 거론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치기 어린 여자애의 행동으로 취급되었고 임수경의 방북으로 인해 남한이 뜻하지 않게 선전 효과를 얻었다는 점 때문에라도 썩 나쁘게 평가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이 발표된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임수경이 직접 기초했다는 이 선언문은 당시 화해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군사적 긴장 완화, 평화협정 체결, 남북 불가침 선언처럼 상식적이며 누구나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이었지만 하필이면 그 중에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꼭 북한의 주장을 따라서만은 아니었고 당시 전대협도 주한미군이 자주통일의 방해물이라는 이유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임수경은 단계적이란 용어를 빼자는 북한의 주장을 물리치긴 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주한미군]] 철수는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었다.[* 70년대부터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박동선 로비 사건과 인권외교 등의 명목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꾸 시끄럽게 굴면 [[주한미군]] 철수하겠다'며 위협을 가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러면 내가 먼저 철수시키겠다'라며 강하게 나가는 등 주한미군 철수 건은 미국-한국-북한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였다.] 비록 탈냉전 분위기가 강해지는 중이었다곤 해도 당시 남한에서 주한미군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우리나라를 구해준 군대'였다. 게다가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까지 거는 일이었다. 덕분에 남측에서 임수경에 대한 비난이 거셌으며 언론도 공안당국이 흘려준 '임수경 가족의 좌익 성향'이란 [[유언비어]]를 충실히 보도하여 [[마녀사냥]]에 적극 가담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91000289103004&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89-09-10&officeId=00028&pageNo=3&printNo=411&publishType=00010|1984년 군 복무 중에 총기사고로 이미 죽은 오빠는 염세주의로 자살했다고 했고]][* 2001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군내 의문사로 거론된 바 있었다. 결과는 시간이 많이 지난지라 원인 판별 불능. 그러나 임수경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1984년 당시 검사표를 본 어른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체념하며 덮기로 하였다고 한다.] 10촌 이내 친척 가운데 월북자가 8명이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를 근거 없는 기사가 나왔다. 이로 인해 당시 한국언론회관 이사장 비서실에 수습직으로 근무 중이던 임수경의 언니는 6월 30일에 '임용해제' 통지를 받았고[* 당시 그녀는 4월 3일에 입사하여 7월 3일로 수습이 만료될 예정이었다.] 부친은 다니던 직장에서 사직 종용 및 해고 협박, 그리고 온갖 욕설이 들어간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